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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생활] [특집/한국 코다 실태 보고]코다, 그들은 왜 ‘엄빠의 엄빠’가 되었는가
  이름 :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등록일 : 11-20

[특집/한국 코다 실태 보고]코다, 그들은 왜 ‘엄빠의 엄빠’가 되었는가

  •  정은경 기자
  •  승인 2023.11.17 14:00
  •  수정 2023.11.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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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2일 코다코리아가 ‘한국 코다 실태조사 보고회’를 가졌다. 이날 보고회는 (재)브라이언임팩트와 다음세대재단의 비영리스타트업 발굴 및 성장지원사업으로 선정돼, 코다코리아가 올 1월부터 8월까지 수행한 ‘한국 코다 실태조사’에 대한 최종보고회로, 이 연구의 책임자인 황지성 박사(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가 발표자로 나섰으며,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대표와 박김영희 전국장애인차별연대 상임대표가 토론자로 나섰다. 코다(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의 약자로, 농인 부모의 청인 자녀를 말한다.
‘장애인생활신문’은 이날 발표된 ‘한국 코다의 실태’를 보고서를 중심으로 재구성해 싣는다. 코다의 전체적인 규모 등이 정량적으로 조사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조사는 성인 코다 11명의 집단 혹은 개별 면접을 통해 진행됐으며, 그로 인해 보다 생생한 코다들의 생활과 생각을 반영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지면 관계상 연구보고서에 나타난 코다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그들의 부모와 코다들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살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정리했음과 안타깝지만 이주가정의 사례, 젠더 이슈 등 상당 부분을 제외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코다의 부모들은 누구인가 1:

원가족 안에서 농가족은 ‘왕따’

 

면접 조사에 참여한 코다들은 모두 11명이었다. 면접 참여 코다(이하 면접참여자)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1969년생, 나이가 어린 사람이 2005년생으로 1969~2005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로, 이들의 농인 부모(이하 농부모)는 1939~1977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들이었다.

농부모들은 그 연령대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어린 시절 가족 안에서 의사소통의 부재와 소외를 경험했다. 한 사례를 제외하고 면접참여자들의 농부모는 모두 청인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형제자매와 조부모 등 가족 대부분이 청인으로서 수어를 알지 못했다. 많은 농아동에게 농학교가 최초로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경험하게 되는 장이자 인간관계와 자아 정체성 형성의 핵심적인 장소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농부모 중에는 그나마 농학교 입학마저 하지 못한 경우도 다수 존재했는데, 이런 아동기 시절 의사소통 및 사회적 경험의 부재 혹은 부적절함은 그들의 일생 삶의 조건은 물론 코다 삶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면접참여자들은 원가족 안에서 농인 부모의 지속적 소외와 고립을 자연스럽게 목격했다고 진술한다. 특히 가족의 행사나 장례, 재산분할 등의 과정에서 농부모가 심각하게 고립되는 상황을 일상적으로 목격한 한 참여자는 이 같은 소외에 대해 자신이 서운함, 소외감 등을 대신 느껴야 했으며, 농부모를 대신해 농부모를 가족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대우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스무 살 때 할아버지 장례식 때였는데, 농인분들이 많이 오셨거든요. 정말 많은 부조에 대해서 정리하는 과정에 엄마한테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이야기 다 끝나고 이게 너의 부조금이야, 그래서 엄마가 “무슨 일이야?” 그러니까 가족들이 다 가면 이야기해줄게. 그러고 삼촌, 외숙모가 그제야 얘기를 해주는 거죠. 이런 식으로 저희 가족은 왕따? 많이 서운했던 것 같아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당연하게 장애인에 대한 돌봄과 보호를 제공해주어야 하는 단위라고 인식되지만, 면접참여자들의 경험은 오히려 가족이 그런 돌봄과 보호 역할에 가장 부적절한 집단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례다.

 

코다의 부모들은 누구인가 2:

대부분 교육수준 낮고 육체노동 종사

 

농부모가 학령기를 보냈던 1970~80년대 이전 시기의 한국 사회의 장애인 교육 현실은 참담했다. 1970년대까지 한국 사회의 의무교육은 무상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난한 계층의 비장애 아동·청소년조차 의무교육 이상의 교육을 받기 어려웠던 현실에서 농인들의 처지는 더욱 열악했다.

농부모들이 학령기였던 1970~80년대의 농학교는 최소한의 교육 기회를 위해 선택할 수 있던 마지막 보루였지만 그들이 학령기에 도달할 즈음, 농학교에 대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았으며, 일반 학교에서는 입학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뒤늦게 농학교를 알고 진학을 한 경우에도, 기본적인 언어 및 사고능력 향상의 결정적 시기에 교육 기회를 놓친 것은 그들의 언어발달 정도, 특히 수어 구사 능력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사참여자 11명의 농부모 중 5명이 무학으로 교육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이런 교육 현실을 방증한다.

뒤늦게 농학교에 입학했어도 당시 농학교는 대개 농학생들의 개별적 상황에 맞게 적절한 보호와 교육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었다. 일부 면접참여자의 농부모가 진학한 사립 농학교들은 교육의 터전이 아니라 어린 농학생들에게 부당하게 노역을 강제하는 곳이었고, 일부 농부모들은 이런 학교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한 후 10대 때부터 생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 재단 비리와 농학생에 대한 갖은 인권침해로 사회적으로 알려진 바 있는 에바다학교에 진학했던 한 면접참여자 어머니의 사례는 이런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희 어머니는 9살 때 평택에 있는 에바다학교에 입학을 해서, 거기가 보육원 아기들, 고아들도 같이 케어를 했던 곳이라고 하거든요. 그때 저희 어머니가 아기들 케어를 하고 빨래, 아기 돌보기를 하셨다고 해요. 학교 졸업한 것도, 저희 어머니의 1살 선배가 있었는데 졸업을 안 해서 왜 안 하냐고 하니까 ‘학교가 일 시키려고 졸업을 안 시켜준다’고…. 그래서 93년도에 졸업시켜 달라고 사람 모아서 항의하니까 그때 졸업을 시켜줬고 5년 후에 에바다 사태가 터졌다고 하더라고요.”

이같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성차별이 존재했다. 무학 농부모 5명 중 3명이 여성이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과 교육 기회에서 남녀 차별이 농/장애와 맞물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수준은 육체노동과 사무직 노동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지만, 농부모들의 삶은 교육수준보다 장애 유무가 직업 유형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임을 보여준다. 면접참여자들의 농부모는 농학교의 전 교육과정을 마쳤는가 여부와 무관하게 육체노동에 종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성들의 경우 목공,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가 다수였고, 여성들은 가사서비스노동(식모 포함), 미싱공장, 노점상, 청소노동 등에 종사했다. 심지어 1980년대 전후 가난한 장애인들이 흔히 했던 풀빵. 호떡 등을 파는 불법 방문판매와 볼펜 방문판매 등에 종사하기도 했다. 면접참여자 한 사람은 볼펜 방문판매를 ‘구걸’이라고 표현했다.

교육권과 생존권은 인간이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며, 따라서 장애 여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한국 사회에서 농인에게 가해지는 교육 및 직업 선택의 제약과 구조적 차별은 그들의 삶과 나아가 그들의 자녀인 코다의 삶까지 근본에서 위협했다.

 

코다의 부모들은 누구인가 3:

청문화와 분리…고립과 자긍심 사이

 

현재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사용으로 농인들 역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회적으로 소통하고 집결할 수 있는 수단이 다양해졌지만, 과거에 농인들이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장은 많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농문화의 집결지는 농학교와 함께 종교기관, 특히 교회였다. 면접참여자들의 농부모들 다수는 농인 교회 활동을 통해 농인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족을 형성했다. 특히 농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거나 전혀 경험하지 못해 수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없고 농인과 동료집단을 형성할 수 없었던 성인 농인들에게 농인 교회는 수어를 습득하고 동료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장이었다. 농인 교회와 농부부로 이어진 가족은 한국 농문화를 형성하는 주요한 집단이 되어왔다.

그런데 농문화는 농인들의 유대감과 친밀성 형성의 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청인세계와 고립된 농인들의 존재 조건이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때로 삶 자체를 파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면접참여자 중 두 명의 농부모들은 농문화 안에서 경제적 사기 피해를 당했다. 사기 사건의 가해자는 농인 교회 목사에서부터 전문 사기조직까지 다양했으며,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농인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농문화에 소속돼 농인들과 친밀감,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가해자들에게 농문화의 폐쇄성과 정서적 결속력은 그 자체로 범죄를 저지르기 매우 용이한 조건이 됐다. 그중 이른바 ‘행복팀’이라고 불리는 사기단의 경우 그 피해 규모가 상당했는데, 일부 피해자들은 경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기도 했다. 한 면접참여자는 농사회에서 이와 같이 막대한 규모의 사기 사건 피해가 발생한 요인은 근본적으로 농-청 간의 사회적 위계와 분리에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농-청 간의 사회적 위계와 분리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가정 기대다. 농인부부로 이루어진 가족의 대다수가 청인 자녀를 출산한다는 사실은 농-청의 이분법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농-청 문화가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이며 다른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해 농사회와 청인사회 모두가 구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기보다 음성중심주의와 정상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농인사회와 청인사회에 모두 소속되어 두 세계를 끊임없이 횡단하는 코다들에게 일상은 모순과 갈등일 수밖에 없다.

 

‘영케어러’로서의 코다 1:

엄마아빠의 통역자 그리고 ‘돌봄 독박’

 

소리를 듣고 말하는 데 다양한 어려움이 있는 농인/청각장애인에게는 의사소통 지원이 일상생활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한국에서 농인/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을 지원하기 위한 수어통역사 양성제도 및 수어통역센터 설립이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에 와서다. 따라서 대부분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부모를 둔 본 면접참여자가 아동‧청소년기를 보낼 시기 한국에는 공식적인 수어통역 지원 서비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0년 이후로 전국에 수어통역센터가 190여 개 설치될 정도로 그 양적 규모가 급속하게 확장되었지만, 통상 센터당 지원되는 기준인력은 센터장 1명과 통역사 4명(3명의 청인 통역사와 1명의 농인통역사)까지 5명이다. 각 시도별로 수어통역센터에서 근무하는 수어통역사와 해당 지역의 등록 청각장애인 수를 대비하면 수어통역사 1인당 최소 300명 이상의 농인/청각장애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농인들은 병원이나 경찰서 업무 같은 긴급하거나 중요한 통역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상적인 부분의 통역 서비스를 거의 제공받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 중 유일한 청인인 코다는 농부모의 통역자로서, 나아가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고스란히 ‘독박 돌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농인/청각장애인은 물론이고 돌봄 제공자까지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있다. 한 면접참여자의 경험을 들어보자.

“부동산 문제, 이사 가는 과정이나 갑자기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 하는데, 제가 그때 중2 땐가 중3 땐가 그래서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는데 확정일자는 받았냐.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만약 이 과정에서 통역을 잘못해서 우리 집 진짜 넘어가면 어떡하지? 내가 통역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그런 걱정이 되게 힘들었던 기억이 나고요.”

어린 코다들이 농부모를 대신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경험이다. 부동산뿐만 아니라 경찰서나 학교 등 공공기관의 업무를 농부모의 통역자로 대신했어야 하는 코다들은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코다는 이와 같은 고립된 돌봄 관계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학업, 직장, 독립 등 규범적인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무언가 ‘뒤처진’, ‘비정상적’ 존재로서 삶을 살아나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여러 형제자매들이 있을 경우, 일반적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맏이는 농부모의 돌봄/노동에서 가장 막중한 책임을 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맏이가 아들인 경우 농부모의 돌봄은 맏이가 아닌 딸이 전적으로 맡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면접참여자 중 딸이자 맏이인 경우와 여러 형제자매 중 유일한 딸이거나 외동딸인 경우들은 예외 없이 농부모의 일차적인 돌봄 제공자로서 역할을 맡아야 했다. 반면 면접참여자 중 아들인 일부 경우와 여성 면접참여자들의 오빠, 남동생은 태어난 순서와 상관없이 학업을 우선적으로 수행할 것이 기대되면서 돌봄 역할에서 상대적으로 면제됐고, 자연스럽게 수어 구사의 능숙함 역시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영케어러’로서의 코다 2:

청인중심 수어통역…농-청 간 위계 상징

 

농인에 대한 의사소통 지원제도와 관련한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언어정치학 및 언어 사용 주체 간의 위계다. 수어통역사는 국가 공인 양성과정을 통해 배출되는 전문화된 서비스로서 위상을 구축했고, 수어통역사 대다수가 청인이다. 이는 농인 서비스 이용자와 청인 서비스 제공자 간 뚜렷한 위계관계와 그로 인한 다양한 갈등을 빚어내는 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수어통역 서비스가 제공된다 하더라도 서비스 제공 주체(청인)가 어느 정도로 농인/청각장애인의 다양성과 차이와 언어권리를 인식하고 그에 맞추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가는 통역사 개개인의 역량과 태도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면접참여자들은 이와 관련해서 ‘수지한국어(Signed Korean)’ 또는 ‘한국어대응수어’라 불리는 언어 체계 및 언어 사용 주체를 둘러싼 권력의 문제를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한국수어는 문법과 단어 등 모든 면에서 한국어와 체계가 전혀 다른 언어지만, ‘수지한국어’ 또는 ‘한국어대응수어’는 한국어 체계에 따른다. 농인의 체현에 맞는 ‘시각-운동 체계의 언어’인 수어는 한국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이나 청인이 배우기가 쉽지 않다. 최근 농인/청각장애인의 교육수준이 향상되고 한국어 교육을 받는 농인/청각장애인이 늘어나면서 한국어대응수어나 문자통역을 선호하는 청각장애인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은 농인, 특히 면접참여자들의 농부모 세대는 압도적으로 한국수어를 사용한다.

이처럼 농인/청각장애인 내부의 차이와 다양성은 시간이 가면서 커지고 있는 반면, 현행 의사소통 지원제도는 그나마 수어통역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농인/청각장애인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의사소통 지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면접참여자들에 따르면 현행 수어통역 서비스 현장 자체도 청인 통역사들의 특권적 위치에 맞추어져 농인의 언어가 아닌 청인 중심‧수지한국어 중심으로 통역이 이루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한 면접참여자의 진술이다.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 등에서 제공되는 수어 통역에서) 수지한국어가 많아요. 제가 뉴스 보면서 정말 이해 안 되는 수어통역사가 있는데 볼 때마다 아, 우리 엄마 아빠는 저걸 어떻게 이해할까, 생각해요. (중략) 제가 아는 농인에게 물어봤는데 그분에게 맞는 뉴스 채널만 보고 맞지 않는 건 안 보시는 거예요. SBS에 잘하시는 분 있는데 그분을 많이 본대요. 비수지(농식 수어) 잘 쓰시고 잘하시더라고요. 다른 채널에 나오는 통역사분들은 수지한국어를 하고 혹은 수지한국어도 아닌 이상한 수어를 쓰시는 분이 있는데, 그거 문제 제기하면 본인들(농인)한테 피해가 가는 거예요. 민원 제기하려면 글로 써야 하잖아요?

일이 많아지니까 그럼 안 보고 말지, 내가 맘에 드는 통역사만 볼게, 이렇게 하는…” 결국 현행 통역 서비스 제도 내에 언어 사용 주체 간 위계까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통역의 공백은 커지게 되고, 이런 통역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은 어김없이 코다에게 돌아간다. 많은 면접참여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수어통역이나 일상 장면의 수어통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농부모들에게 그들의 수준에 맞는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것이 일상이라고 했다.

결국 사회적인 시스템의 부재로 성인이 된 현재에도 한국의 코다 대다수는 농부모의 모든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돌봄 제공자로서, 자신만의 인생을 누리는 데 제한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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