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지, 노들의 30년에 경의를 보내며

2003년이었는지 2004년이었는지. 어쨌든 오래전 어느 봄날 한 친구가 시위 현장에서 연행됐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운동권이 보이면 멀리 돌아다니기 바빴던 저로서는 아직도 경찰이 실제로 사람들을 연행한다는 사실도 생경했고, 더욱더 시위에 나가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친구가 연행당한 곳은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하던 세종문화회관 앞 집회 현장. 장애인들의 집회라면 더욱더 신경 써서 돌아가야겠구나, 마음에 새겨놓았습니다.

결심은 딱히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정신을 차려보니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있던 장애인이동권연대와 간담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 조금 지난 이후에는 420투쟁 집회에 함께 하고 있었고, 어느 날은 활동지원제도 도입을 요구하며 마포대교를 기어서 건너는 이들과 한패가 되어 경찰과 싸우고 있더군요. 장애인 차별철폐 운동과 꽤 가까운 빈곤사회연대에서 2010년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장애인 수용시설 폐지를 요구하며 1,842일간 광화문역에서 함께 농성을 벌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저로서는 나름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변화의 시간을 겪는 동안 노들은 늘 곁에 있었습니다.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되자’는 노들야학의 깃발은 김명학 교장 선생님의 휠체어에 묶여서든, 야학 교사 한명희의 손에 들려서든 언제나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20주년을 바라보며 감회에 사로잡힌 것이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30주년을 맞은 노들의 시간은 어떻게 세어야 할까요? 참여한 집회의 개수로? 만들어 낸 복지 정책과 예산, 저상버스와 엘리베이터로? 오고 간 사람들, 마로니에 공원 입구에서 피운 담배, 혹은 야학에서 실려 나간 쓰레기봉투로?

야학 30주년을 맞아 ‘연대단체가 본 노들야학’이라는 주제를 덥석 받았는데,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한참 동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학에서 왜 투쟁을 하냐’고 의문을 갖는다던데, 저는 ‘집회에서만 보던 야학이 진짜 공부도 하는 곳이었네?’라는 반대의 의문을 이따금 떠올렸다는 것만 자꾸 기억납니다. 실제로 공부도 한다는 것, 그것에 여전히 이따금 놀랄 정도로 저는 노들야학을 잘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김윤영 활동가가 발언 중이다. 김 활동가 오른쪽에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를 요구하며 삭발한 이형숙 서울장차연 대표가 있다. 사진 김윤영
김윤영 활동가가 발언 중이다. 김 활동가 오른쪽에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를 요구하며 삭발한 이형숙 서울장차연 대표가 있다. 사진 김윤영

그럼에도 저에게 30주년 기념 『노들바람』의 영광스러운 지면이 돌아온 까닭은 아무래도 우리가 함께 (절반쯤) 일궈낸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투쟁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중 주거급여에서는 완전히, 생계급여에서는 절반쯤 폐지해 냈지만, 의료급여에서는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부양의무자기준 말이에요. 가족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이나 소득이 있으면 수급자조차 될 수 없도록 만드는 부양의무자기준은 가난에 빠진 이들에게 족쇄이자 절망이었지만, 이 문제를 제기하는 조직된 사람들의 힘은 부족했습니다. 장애인 운동은 꾸준히 일궈온 역량으로 부양의무자기준의 문제를 사회 전체에 제기했습니다.

시설에 있을 때는 혼자였는데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려고 시도할 때마다 가족의 존재가 복지신청조차 가로막는다는 우스운 사실은, 시간이 흘러 한국 사회 복지정책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습니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는 시기상조라든지, 국민의 정서와 다르다든지, 너무 많은 재정이 들어 비현실적이라고 외면했던 보건복지부는 똑바로 대답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가난한 가족들을 가난의 굴레에 가두는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말이죠.

여전히 부양의무자기준은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고, 노들야학 조상지 학생회장님을 비롯한 우리가 아는,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도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부양의무자기준이 언젠가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이제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가 꼭 필요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보낸 시간을 지울 수는 없으니까요. 노들야학과, 또 전장연 동지들과 함께 그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은 늘 흔들리고 갈팡질팡한 제 마음에 단단한 닻이 되었습니다.

꼭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운동이 아니더라도 반빈곤운동과 장애인 차별철폐 운동은 서로를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홈리스야학 학생들부터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예사인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밀려오는 고민을 해결하려면 노들야학 학생과 교사들에게 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야 하지요. 노들야학은 수급에서 탈락하거나 급한 병원비 지원이 뭐가 있는지, 채권추심에 시달리는 동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궁금할 때마다 반빈곤운동을 두드립니다. 2004년 문을 연 빈곤사회연대는 2001년 시작한 ‘기초법개정 연석회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요. 수급비가 너무 적어 살 수가 없다며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수급비를 반납하고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했던 최옥란 열사로부터 반빈곤 운동과 장애 운동은 이미 함께하기를 예정했던 셈입니다.

김윤영 활동가가 노들야학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사진 김윤영
김윤영 활동가가 노들야학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사진 김윤영

반빈곤운동에도 야학이 있습니다. 노들야학보다는 작고 역사도 좀 짧지만, 우리끼리는 복작복작 재밌는 홈리스야학입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천막 야학까지 감수했던 노들야학처럼 홈리스야학도 이전에는 공간이 없어 다른 단체 사무실을 빌려 ‘주말배움터’를 열었습니다. 주말배움터는 뚱뚱한 모니터의 옛날 컴퓨터들을 봉고차 한가득 싸 들고 다니며 매주 학교 설립과 폐교를 반복했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한 장소를 차지했던 곳은 노들이었습니다. 노들야학이 정립전자를 떠나 대학로에 터전을 마련하고, ‘밤야’자가 들어간 ‘야학(夜學)’에서 ‘들야’자가 들어간 ‘야학(野學)’이 되었을 무렵입니다. 좋은 공간을 무료로 빌려 쓰는 일이 고마워 주말배움터 사람들은 수업이 끝나고 나면 힘껏 청소를 했대요. 빌딩 청소일을 하던 한 학생이 그곳에서 사용하는 왁싱기까지 가져와 바닥을 반짝이게 밀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함께 쓸고 닦던 사람들은 얼굴이 밝아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함께 쌓아왔나 봐요. 서로의 기억이 되면서 말이죠.

노란 은행잎이 물드는 가을이 될 때마다 저는 ‘노란들판의 꿈’ 행사를 기다립니다. 노들에서 시작해 세상을 바꾸는 꿈으로 달려간 노란들판‘들’의 농밀한 관계, 부지런한 오감이 올해는 어떤 것들을 발견했을까? 궁금하고 좀 부러워하는 마음을 안고 마로니에공원에 갑니다. 세상의 어떤 기준은 장애나 가난을 쓸모없음, 혹은 실패와 동의어로 쓴다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걷지 않는 길을 우리는 늘 걷고 있지 않나요. 새로운 길을 걷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밖에, 새로운 것을 요구할 수밖에, 새로운 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요.

그 시간은 멋지기만 하기보다 다음 달 월세를 전전긍긍하고, 어쩐지 마음 안 맞는 사람과 신경전을 벌이고, 괜한 일을 벌였다며 후회하다가 더 이상은 못해 먹겠다고 울화통을 터트리는 날들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노들은 그 시간을 회피한 적이 없습니다. 각자 알아서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한 발짝 물러서고 싶을 때 노들은 한 발 더 가까이, 서로의 문제를 꼭 끌어안으며 나아갔습니다. 주저하는 마음을 열심히 밀어내고 기어코 한 발 더 다가서는 것이 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온 노들의 30년에 경의를 보냅니다.

김윤영 활동가가 2015년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김윤영
김윤영 활동가가 2015년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김윤영

삼십 년, 오래됐다지만 아무래도 전성시대는 지금부터가 아닐까 예감합니다. 이 예감의 근거는 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내고, 틈틈이 세상도 바꾸는 동지 간으로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습니다. 빈곤사회연대도 빈곤과 차별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는 노들의 근거 있는 자신감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잘살아보겠습니다.